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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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휴전회담이 본 궤도에 오르며 주택건설 계획도 본격화 되었다. 주택영단은 부산 영도 청학동 경사지에 흙벽돌집 약 200호를 건설하였는데, 이 주택은 마루 하나, 부엌 하나, 방 하나에 변소는 따로 설치한 구조였다. 이 흙벽돌 주택의 외부는 시멘트 마감을 해서 외관상으로는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1953년 서울로 환도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주택은 약 60만호가 파괴되어 주택문제는 심각한 상황이었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만의 서울복귀는 가능하면 월동하고 하자, 경찰은 피난민의 도강을 엄격히 통제하여 서울에 집이 없는 사람은 허락하지 말고, 서울 시내에서 길가나 냇가에 판지집이나 흙집을 짓는 것을 절대 금하며, 정부는 외국에 차관을 하여서라도 우선 100만호를 지을 것이며, 서울에서는 도시계획을 하고 있는 만큼 구역을 엄수해서 제도에 맞는 집만 짓도록 소관 경찰은 책임을 져야한다" 고 담화를 발표하기 이른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 20년사, 1979년 10월, 208쪽

전쟁 후 주택 재건을 위해서는 주택영단 외에도 한국산업은행 외국원조 기관인 국제협력단이나 국제연합한국재건단 같은 기관이 활약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은 5500호의 일반 후생주택(재건주택)을 전국 각 도에 건설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재건주택은 건평 9평으로 방2칸, 마루1칸, 부엌 1칸의 흙벽돌 구조였다.
 평면은 밭 전 자식을 택해서 서울의 안암동에 최초로 49채의 재건주택을 지었다. 그 후 1954년에 주택영단은 정릉동, 휘경동 등지에 계속해서 9평 재건주택을 건설했다. 특히 정릉천변에 253호의 흙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은 해방 후 영단이 개발한 최초의 대규모 단지였다.
 그리고 홍제동에는 부흥주택 136호를 건설하였는데 문화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이 입주했다. 소설가, 배우, 화가, 음악가, 교수, 신문기자, 방송관계자, 검사 등이 입주해서, 이 지역은 문화촌이라 불렸다. 홍제동 부흥주택에 입주한 만화가 김용환씨는 '즐거운 문화촌' 이라는 삽화를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게, 2011

새마을 주택에는 안방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같은 귀한 전기 제품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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