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4일 화요일

보안여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211728001&code=960100

· 내일 없는 내일 _ 통의동 보안여관
박찬국, 망한도시개발전문, 단채널 영상, 오브제, 가변설치, 2018.
박찬국, 망한도시개발전문, 단채널 영상, 오브제, 가변설치, 2018.
경복궁 서문 영추문의 맞은편은 종로구 통의동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고위관리직이 드나들던 역사적인 동네인 만큼이나 ‘동네의 역사’도 화려한데, 그 미시적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탐색되는 공간 중 하나가 현재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통의동 보안여관 천장의 상량판.
통의동 보안여관 천장의 상량판.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왕의 잠저였던 터로, 근대에는 동인문학의 발상지로 추측되는 장소이다. 통의동의 꼬불꼬불한 한옥 골목이 이상의 시 <오감도>에 등장하는 골목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이곳에 위치한 ‘보안여관’ 역시 예사 여관과는 사뭇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미당 서정주 등 문인이 장기 투숙하며 시를 썼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국 아티스트 레지던시(예술가들이 생활과 작업을 함께 하는 스튜디오)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후 고 최낙경 화백이 운영하던 여관을 일맥문화재단이 인수하였고, 보안여관의 전신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구관과 증축 개관한 신관으로 구성하여 현재는 ‘문화숙박업’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포함해 서점과 레지던스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진형제, 풍경(風經), 단채널 영상, 비디오 설치, 00_20_57, 컬러, 16_9, 사운드 스테레오, 2016.
무진형제, 풍경(風經), 단채널 영상, 비디오 설치, 00_20_57, 컬러, 16_9, 사운드 스테레오, 2016.
<내일 없는 내일>은 통의동 보안여관이 올해 개관 11주년을 맞아 그랜드 오픈한 전시이다. 작가 라인업이 화려한데, 믹스라이스, 백현주, 권용주, 박찬국, 여다함, 한성우, 무진형제 등이 참여 작가들이다. 이 전시는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보안여관에서 진행된 전시들의 서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어 온 다섯 개의 키워드(도시, 풍경, 기억, 여관, 통의동)를 재해석한 작업들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권용주의 <마대_각종 폐기물을 채운 마대자루>는 도시에서 사라지고 있는 부산물(폐기물을 담은 마대자루)을 활용해서 도시의 재개발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담아냈고, 세 명의 형제로 이루어진 무진형제는 스톱모션 영상을 통해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톤으로 그려냈다.
권용주, <마대_각종 폐기물을 채운 마대자루>, 석고캐스팅, 가변설치, 2018.
권용주, <마대_각종 폐기물을 채운 마대자루>, 석고캐스팅, 가변설치, 2018.
보안여관이 11년 동안 진행되면서 그간 진행한 전시의 작가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권용주 작가의 경우는 보안여관의 신호탄을 알린 전시 <휘경 : 사라지는 풍경>(2009)에 참여했던 작가이고,당시와 지금의 재개발 폭력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올댓아트 전시] 70여 년 된 여관에서 전시 볼까?…‘내일 없는 내일’
백현주, 오늘의주인, pvc 벌룬 가변설치.
백현주, 오늘의주인, pvc 벌룬 가변설치.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믹스라이스와 한국 커뮤니티 아트의 산증인 박찬국 작가 등 화려한 작가 라인업 중에서, 나의 이목을 가장 사로잡은 작업은 바로 백현주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이다. 백현주 작가는 이 전시의 오프닝에 내레이터 모델을 섭외하여 흔한 한국 ‘그랑드 오픈’의 풍경을 차용했다. 보안여관의 입구 앞에 색색의 풍선으로 아치형 게이트를 세우고, 짧은 치마에 마이크를 든 어여쁜 내레이터 모델들이 이 역사적인 여관의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 내용이 정말 ‘가관’이다.
백현주, 남겨지는 것의 권리_RightToBe, 다채널 비디오_현수막_유리시트 가변설치, 영상 캡쳐 이미지본, 2018.
백현주, 남겨지는 것의 권리_RightToBe, 다채널 비디오_현수막_유리시트 가변설치, 영상 캡쳐 이미지본, 2018.
“보안여관은 근대 일본식 건축양식을 표방한 건물로서, 미당 서정주가 장기 투숙한 역사적인 문화 공간이며...”
이런 내용이 내레이터 모델들의 익숙한 톤으로 끊임없이 지속되고, 급기야 이상의 시를 읊는 대목에서는 폭소가 터질 수밖에 없다. (이 퍼포먼스는 영상으로 기록되어 전시 중에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작업이 아니고 무엇일까. 근대문화유산, 이상, 서정주, 동인문학, 레지던스, 현대미술 등 모든 것들이 내레이터 특유의 강력한 억양 속에 휘휘 녹아들어 갈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고 싶다. 들리는 사람에게는 들리고, 현대미술이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보일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앞으로 보안여관과, 도시/풍경/재개발을 모티프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향후 10년에도 기대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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