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1일 토요일

http://v.media.daum.net/v/20180721090046653?d=y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낯선 남성이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 층수를 누르는데, 남성은 미동이 없었다. 문이 열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등 너머로 남성의 음성이 들렸다. “아가씨, 내가 왜 쫓아왔는지 말해줄까요?”
대부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경찰에 곧장 신고할 터이다. 사연 속 주인공도 그랬다. 그런데 만약 ‘단지 따라왔을 뿐’이기에 처벌할 수 없다면?
여기 두 여성이 있다. 이들 모두 서울 중랑구 일대에 출몰하는 이른바 ‘초커남’에게 쫓긴 경험이 있다. 초커남은 이 남성이 늘 초커(길이가 짧아 목에 감듯이 거는 목걸이)를 착용해 붙은 별명이다. 포털 사이트에 ‘중랑구 초커남’을 검색하면 여러 게시물이 나올 정도로 ‘유명’ 인사다.
“제가 크게 다쳤다면 달라졌을까요?”
전모(18·여·직장인)씨는 지난해 겨울 어느날 밤 12시30분쯤 자신이 거주하는 면목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커남과 마주쳤다. 함께 승강기에 오른 초커남은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거울에 비친 전씨를 빤히 쳐다봤다고 한다.
전씨는 목적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집 쪽으로 걷던 중 문득 승강기 문이 닫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니 초커남이 여전히 있었다. 전씨가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초커남은 “내가 왜 쫓왔는지 말해줄까”라고 반문한 뒤 전에 이 아파트에서 남녀 한 쌍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현상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초커남의 황당한 변명에 분노한 전씨는 곧장 경찰에 신고한 뒤 남자친구에게 연락했다. 당시 전씨 가족은 모두 외출한 상태였다. 전씨는 “경찰이 올 때까지 붙잡아둬야겠다는 생각에 초커남과 1층까지 내려갔다. 그러다 경찰이 왔는데 첫 마디가 ‘아저씨 자주 보이시네요’였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남자친구가 왔다. 그는 관련 규정이 없어 처벌은 크지 않을 거라는 경찰을 향해 “그럼 여자친구가 맞거나 찔리기라도 해야 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씨도 “저 사람이 집 층수까지 알았는데 또 오면 어떡하냐”고 항의했다. 경찰의 답변은 “이 남성이 같은 사람에게 두 번 그런 적은 없다”였다.
이날 상황은 초커남이 인근 파출소에 가고, 전씨는 집 앞에서 진술서를 쓰며 일단락됐다. 전씨는 “얼마 뒤 경찰 연락을 받고 조사받으러 갔는데 ‘처벌은 크게 못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초커남이 보복하러 올 것 같아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제 곧 이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초커남 무서워 직장까지 옮겼어요.”
‘두 번 그런 적 없다’는 경찰의 말과 달리 A(28·여·직장인)씨는 초커남에게 무려 세 차례나 시달렸다. 첫 대면은 지난해 여름 어느날 밤 10시55분쯤 A씨의 근무지에서다. 초커남이 자신을 알아챌까봐 두렵다는 A씨를 위해 인터뷰 내용을 최대한 요약해 옮긴다. 다음은 A씨의 진술.
“동료들 중 가장 늦게 퇴근했기 때문에 홀로 근무지를 나서는데 사소한 문제가 벌어져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었어요. 초커남이 다가와 도와주더라고요. 감사하다고 말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죠. 그런데 그 사람이 지하철까지 따라 타면서 계속 말을 걸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볼 정도로. 갑자기 반대 방향 지하철 타는 법을 묻더라고요. 본인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먼저 내렸어요.”
두 번째는 올해 1월 30일 밤 10시쯤이었다. 초커남이 A씨 근무지에 왔다. “제가 알아보고 몸을 피했더니 동료에게 ‘어떤 여자가 숨은 것 같은데 나는 이상한 사람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나갔다, 들어왔다를 몇 번 반복하다 혼자 사라졌고요. 세 번째로 나타난 건 지난달 16일쯤이에요. 퇴근길에 마주쳤고 또 저를 따라오길래 일 하는 곳에 돌아갔어요. 그 사람은 따라 들어왔어요. 경찰에 신고했지만 초커남이 떠난 뒤 도착했고요.”
A씨는 초커남을 피해 근무지를 바꿨다. 옮기기 전, A씨 동료가 자신의 언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늦은 밤 귀가하는데 집 앞 골목길까지 쫓아왔다고 한다. 동료의 언니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중 하나를 빼고 뒤돌아보자 초커남은 “왜 한 쪽만 빼요?”라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경범죄’라는 경찰… “피해 예방 위해 적극 나서야”
전씨와 A씨는 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이 약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불특정 다수에게 지속적으로 공포심을 줬다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거다. A씨는 전 동료로부터 지난 15일쯤에도 초커남이 근무지에 찾아와 기웃거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가 다른 여성 뒤를 쫓는 모습을 봤다는 인터넷 게시물도 여러 개 있다. 초커남에게 시달린 여성이 꽤 많은 것으로 보인다.
A씨는 “출동한 경찰관에게 다음 날 순찰을 돌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오지 않았다”며 “전화했더니 통화하는 경찰관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회를 요청하자 내용을 파악하고 그제서야 왔다”고 말했다. 또 “동료의 언니는 잘 부탁드린다는 취지로 경찰서에 음료까지 사들고 가 조사를 받았다더라. 그정도로 무서워했다”면서 “이때도 벌금형만 내려진 걸로 알고있다”고 전했다.
경찰도 답답하다. 현재 스토킹은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1항 제41호 ‘지속적 괴롭힘’에 해당된다.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나타났음에도 지속적으로 면회·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따라다니기·잠복해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계속하면 스토킹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 처벌은 10만원 이하의 벌금과 구류 또는 과료에 그친다. 무단횡단, 쓰레기 투기 등도 같은 경범죄다.
경찰 관계자는 “(초커남 사건과 같은 경우) 보통 파출소에서 순찰을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8만원의 통고처분(스티커발부)이 내려진다”고 설명했다. 단 한차례만 뒤쫓아 오더라도 스토킹이 성립되냐고 묻자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답했다.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노선이 활동가는 1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많은 시민이 계속해서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물리력 행사나 신체접촉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법적인 처벌 근거가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면서 “이런 식의 피해가 누적될 경우 경찰 측에서 처벌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노 활동가는 “일반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피해자가 일일이 처벌 근거를 찾아 신고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초커남도 경찰이 자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음에도 체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활개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피해 예방 차원에서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스토킹범죄 처벌법, 통과되면…
법무부는 지난 5월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마련하고 입법 예고했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지속적, 반복적인 특정 행위를 통해 불안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이 내려진다. 흉기를 사용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법원은 결정을 통해 가해자에게 서면 경고나 피해자 접근 금지 등 조치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따라서 이 제정안이 통과돼 시행되고, A씨가 초커남을 신고하면 법원 판단에 따라 범칙금 수준이 아닌 징역 또는 벌금형이 내려진다. 다만 전씨 사례처럼 단발성 행위에 그치면 처벌이 어렵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0일 “이럴 경우 제도 내에서 해결이 어렵더라도 남성이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경찰 차원의 강력한 경고가 필요하다”며 “대응 수준에 따라 남성의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박은주 박태환 이재빈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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