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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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87공수전투단이 1951년 3월 23일 문산 지역에 낙하하고 있다. 적의 퇴로를 끊는다는 차원에서 벌인 이 공수 작전은 보병인 국군 1사단이 서울에서 밀고 올라가는 지상 작전과 연계해 벌어졌다. 아군은 이 작전으로 임진강 북방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1년 3월 23일 경기도 문산에 투하된 미 187공수전투단의 단장은 프랭크 보웬 준장이었고, 부단장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훗날 베트남전 초대 미군 총사령관) 대령이었다. 투하에 앞서 미 1군단 부군단장 페러 준장은 급기야 내게 “한국군이 미 공수부대와의 링크업(link-up: 연계) 작전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평안남도 숙천에서 해본 경험이 있다”고 했지만 고도의 정밀성과 신속성을 갖춰야 하는 작전이라서 그들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백미(白眉)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때도 연계작전이 펼쳐졌다. 노르망디의 적 후방에 공정대를 투입한 뒤 해안에서 밀고 올라가는 작전 개념이었지만 연계가 잘 안 돼 공정대의 피해가 막심했다. 문산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한국군의 위상이 크게 실추할 수 있었다.

일선 전투의 맹장이자 숙천에서 연계작전 경험이 있었던 김점곤 12연대장이 중책을 맡았다. 연계작전은 장비와 화력·기동력을 고루 갖춰야 성공할 수 있다. 미 72전차대대로부터 M-46 신형 탱크의 기동력을 빌렸다. 국군 12연대는 서대문에서 미 72전차대대의 탱크 위에 올라타고 진군했다. 문산에 공중 투하되는 공정대와 시간·장소를 정확히 맞춰야 했다. 미군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페러 준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진격할 때의 주의사항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거듭 “알겠느냐”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등 조바심을 보였다. 평양으로 진격할 때 보병과 전차를 결합해 운용한 경험이 있던 나는 “걱정할 것 없다. 경험이 충분하다”며 달랬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국군 12연대는 일사천리로 진군했다. 3월 23일 서울을 떠난 우리는 그날 오전 문산에 도착했다.

때 맞춰 135대의 수송기에 나눠 탄 미군의 187 공수전투단 대원 3447명이 문산 상공에서 낙하산을 펼쳤다. 하늘을 새까맣게 가리며 떨어지는 낙하산 부대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105㎜ 대포도 낙하산에 매달려 공중으로 떨어졌다. 다른 장비와 군수품 등 220t에 달하는 물자도 닷새에 걸쳐 함께 투하됐다. 대규모 작전이었으며 우리 1사단은 보기 좋게 연계작전을 완수했다. 작전 목표는 문산 지역에 남아 있던 적 6000여 명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속히 탈출했다. 우리는 1개 연대 규모의 적을 소탕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개전 초에 내가 지켰던 곳이 임진강이다. 운산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평양을 내주고 사리원을 거쳐 다시 후퇴했던 곳도 임진강이다. 이제 이 강 앞에 세 번째로 섰다.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그 러나 이 강 앞에 다시 선 내 마음은 한가하지 않았다. 강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적군들을 하나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임진강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크게 굴곡을 만드는 지형이 있다. 파주군 장파리 서쪽이다. 북에서 남으로 한참 내려와 다시 서쪽으로 가면서 물굽이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는 곳이다. 말하자면 ‘U자(字)’ 형태의 물굽이다. 꼭 반도(半島)처럼 생긴 곳이다.

그 물굽이 남쪽 끝에 적들이 있었다. 먼저 강 너머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거대한 포막(砲幕)이 만들어져 적의 시야를 분명히 흐린 시점이었다. 나는 강 양쪽으로 특공대 2개 중대를 파견했다. 활짝 펴놓은 그물에 물고기가 걸려드는 형국이었다. 물굽이 쪽에 포진해 있던 적 200명을 한꺼번에 잡았다. 특공대는 이들을 포로로 잡아 무사히 강을 건너왔다.

나는 신이 났다. 많은 포로를 한꺼번에 잡고 나서 드는 일종의 공명심이었다. 다시 임진강 북안에 남아 있는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더 넘어가서 잡아오는 게 가능해 보였다. 다시 그물작전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이 때 부족한 내 경험을 차분하면서 사려 깊게 메워 주던 작전 고문관 메이 대위가 나섰다. 그는 “사단장님, 좋은 일이 꼭 반복해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포로 200명을 잡은 것으로 만족하는 게 좋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격렬한 전장을 함께 거치면서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이다. 사려가 깊어 늘 신중한 그의 견해는 공명심에 들떠 있던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백선엽 장군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2/01/3613891.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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