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6일 토요일

와우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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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아파트서울의 무허가 불량건물의 수가 급증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에 1969년 건립되었던 시민아파트이며,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참사로 악명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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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배경 [편집]

6.25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그때까지 철저히 제한되었던 한강 도강이 자유롭게 되자 많은 전재민이 일시에 들어온 데 이어,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의 인구수가 격증한데 따라 무허가 불량건물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무허가 건물이 걷잡을수 없을만큼 늘어나는 것을 염려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의 정리를 지시한다. 그 당시 서울 시장김현옥 시장은 각 구청에 지시하여 무허가 건물 전수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13만 6,650동이 집계되었다. 김현옥 시장은 4만 6,650동을 이른바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현지 개량하고, 나머지 9만 동을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여 아파트에 주민들을 이주 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경기도 광주시)내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이주, 정착시킨다는 방침을 새운다. 1968년 12월 3일,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 발표되고, 1969년 1년동안 32개 지구에 406동 1만 5,840가구분의 아파트를 건립한다.

와우 아파트 붕괴 [편집]

사건 개요 [편집]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는 1970년 4월 8일 오전6시40분 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층 15동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고이며,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무면허 건설업자는 가파른 중턱에 아파트를 지었으며, 건설 허가를 따내기 위해 쓴 뇌물 때문에 공사자재를 아껴야 하였다. 그래서 철근 70개를 넣어야만 튼튼하게 유지될 기둥에 달랑 5개의 철근을 넣었으며, 결국에는 준공 4개월 만에 아파트가 무너져 사망 33명, 부상 40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후 서울시내 405개 동 시민아파트 전체에 대한 안전진단이 실시되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부실공사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이렇듯 연이은 사고는 70, 80년대의 하도급 비리와 준공검사의 허점을 드러내었다.

사고 원인 [편집]

  • 시공회사인 대룡건설(주)이 맡은 제3공구 13~16동 아파트에 투입된 총예산은 관급자재로 시멘트 1만 6,614부대, 철근 105만 5,813t(932만 7,026원) 등 2,638만 3,455원이었다. 이 예산은 택지조성비·축대비 등을 제외하면 건축비가 평당 1만 원도 채 안 되는 부실한 공사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 너무 짧은 공사기간.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26일 준공했다.
  •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의 설계상 건물 하중은 ㎡당 280㎏인데 무너진 15동의 실제하중은 900여㎏으로 ㎡당 600㎏ 이상 초과되어 있었다. 설계상 하중이 280㎏으로 낮게 정해진 것은 당시 불량 무허가건물 입주자들의 생활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 70도 경사진 산비탈에 세워진 와우아파트가 위치한 곳은 와우산 중턱인데다가 계곡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를 할 때는 이 점을 무시하고 아파트 뒷쪽만이 암반 위에 얹혀 있었을 뿐, 아파트 무게의 3/4을 차지하는 앞쪽에 30 × 7㎝의 기둥 7개만 박아서 기초를 삼았다.
  • 기둥 하나에 19㎜ 철근 70개씩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5개 정도씩밖에 쓰지 않았다.
  • 콘크리트 배합비율도 시멘트를 넣는 시늉만 내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모래기둥이라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 지경이었다. 산꼭대기라 물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수도 물로 콘크리트를 비비면 되기 때문이었다.
  • 또한, 기둥의 깊이는 2m 밖에 안되는 암반이 아닌 부토(敷土)위에 세웠다. 결국 해빙기인 4월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지게 되었다.

사고 결과 [편집]

와우 아파트는 서울특별시가 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 아파트였다. 이 사고로 인해 당시 서울 시장김현옥이 같은 해 4월 16일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현재 와우 아파트는 철거되었고, 철거 부지는 녹지 공간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여파 [편집]

와우아파트 사건 이후 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총 대상 405동 중 보수를 해야 할 동 수가 349동이었던 것만 봐도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1971~1977년 간에 모두 101동이 철거되었고 철거비용이 447동 건립비용에 거의 맞먹는 50억 700만원이 소요되었다. 성과 위주의 전시행정으로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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